San Diego State University 사회사업석사 1학년 과정에서
석사 과정 1학년때는 참 힘들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도 신기한 것을 내가 미국에서 석사를 하는 동안 감기도 한번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부터 학부시절까지 거의 골골하였다. 툭하면 병원에 실려가고 쓰러
지고 몸살고 집에 업혀오기 일쑤었고 모두들 내가 병이 날가봐 조마조마해 하는 완전 약골이었는데 나 스스로도 내가 건강이 나빠서 미국에서 석사를 잘 할 수 있을 지 자신
이 없었고 속으로는 뭐 오래 걸리더라도 쉬엄 쉬엄하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다른 전공들은 석사과정이 한 학기에 세 과목 정도만 들으면 되는 데 사회사업학은 3학점
과목을 5개씩이나 들어야 했다. 게다가 1학년 때는 인턴이 주당 16시간이니까 꼬박 이틀을 인턴을 하던지 아니면 반나절씩 해서 4일을 인턴을 해야하고 수업을 저녁에 들었
다. 게다가 매 과목에 리포터가 한 학기에 두 세개씩 있고 매 시간 수업마다 읽어가야 할 분량이 대략 200-300페이지 정도씩은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계산해보면 정말 내가
눈을 떠 있는 시간은 완전히 빡빡하게 틈이 없이 공부하고 수업듣고 인턴을 해야하는 숨쉴 틈이 없는 스케쥴이었다. 게다가 다니고 있던 미국 교회는 목요저녁예배 주일날
오전, 저녁예배, 토요일 방문 전도, 거기에 더하여 저녁에 하는 신학교 수업을 한 학기에 한 과목씩 청강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한 번도 밤샘을 한 적이 없다. 한번도 아프지도 않았고...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요 기적이다.
딱 한번 아팠는데 인턴 하러 갔는데 오전인데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쓱하여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얼굴이 창백하다고 하면서
같이 빨리 병원에 가자고 해서 갔더니 독거미한테 물렸다고 하였다. 잘 찾아보니까 다리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바로 독을 해독하는 처치를 하고 집으로 와서
하루 쉬고 바로 회복되었다. 덕분에 인턴 하루 쉴 수 있었다... ㅋㅋㅋ
2학기가 시작되기 전 켈리 교수님께서 나에게 조교를 할 마음이 없냐고 물으셨다. 그 학교에서는 교수님 별로 조교를 뽑는데 주당 5시간 -10시간 정도 조교를 한다.
시간당 조교 수당은 당시에 10불이었으니까 한달에 나는 주당 10시간씩 일하고 400불 정도를 받았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40만원정도는 되니까 내 용돈으로는 충분했다.
참 많은 학생들이 지원했었는데 특별히 교수님이 나를 뽑으신 이유는 문화적인 이유였다... 내가 영어도 부족하고 다른 똑똑한 미국 아이들도 많았지만 미국 아이들이
노인에 대한 태도가 참 무례하고 노인 혐오증이 있는 것 같았다. 켈리교수님이 당시에 연세가 70세가 다 되셨으니까 그 당시에는 원로교수셨는데 강의나 활동이
그때까지도 활발하셨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모두 교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옆에서 내가 볼때도 참 무례하였다. 교수님의 말은 완전히 마음을 닫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수업때 보면 교수님의 얼굴이 주름이 많다고 쳐다보는 것 조차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런데 켈리교수님은 중국에서 오래 교수를 한 적이 있어서 동양문화를 잘 이해하시고 내가 자신을 오히려 경륜이 많은 분으로 존경하는 것을 좋게 보시고 조교로 쓰시고
싶어하신 것이 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의 경로우대 문화때문에 특혜를 본 것이다.
주당 10시간 일을 하는 것이 었는데 교수님연구실에 내가 편한 시간에 가서 교수님이 책상에 두신 연구질문에 대한 대답을 인터넷이나 도서관에서 찾아서 강의 자료를
만드는 일과 CIP라고 하는 외국 사회복지사들과의 인턴교류프로그램담당 조교를 하는 일이 었는데... 대부분은 자료찾는 일이었는데 교수님의 질문을 다 찾으면 시간에
관계없이 그 주의 일은 다 끝나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보통 10개 정도의 연구질문을 종이에 적어놓으셨는데 내가 영어로 자료찾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지고 그리 컴퓨터를
잘 다루는 편도 아니어서 일단은 야후싸이트에 들어가서 교수님의 질문에서 핵심단어를 검색란에 쳐 놓고는 기도를 먼저했다. 하나님께서 빨리 찾게 해 주시라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검색을 누르면 답이 바로 바로 컴퓨터에 떳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2시간만에 어떤 경우에는 4시간정도에 일을 다 마칠 수 있어다! 완전히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질문에 답을 못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2년 동안이나 교수님의 조교를 했는데도... 나중에 교수님은 나보고 컴퓨터 천재라고 하시면서 온 학교에
내가 컴퓨터 천재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셨다. 정미한테 질문을 주면 컴퓨터에서 답을 다 찾아준다고 하시면서... ㅋ ㅋ
학비는 한 학기 등록금이 400만원 정도였고 한달 생활비를 부모님께서 100만원을 보내주셨다. 100만원을 당시에 환전하면 800불 정도가 되었고 하숙비가 600불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십일조를 80불내고 나머지 120불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았는데 기름값이 싸고 또 하숙집에서 점심까지 꼭 들어가서 먹고 나왔고 아니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서 절약했고... 일년에 한번은 켈리교수님께서 주선해주셔서 한 학기 학비를 면제받았다... 게다가 조교 수당도 받았으니까 일년에 총 한국 돈으로
1600만원 정도를 쓴 것 같다... 게다가 미국 교회에서 성도들 중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아이들이 굶는 걸 보면 오히려 내가 도와줄 돈 까지 있었다.
지금 보다 오히려 그때 내가 금전적으로도 남을 더 많이 도왔던 것 같다.
모두들 내가 그 돈으로 일년을 아무탈 없이 잘 보냈다고 하면 놀란다. 요즘 주변 사람들 보면 자녀를 잘 모르고 외국에 공부하러 보내면 현지 교민들이 하숙을 하면서
완전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를 많이 본다. 심지어는 한달 하숙비를 200만원씩 받는 경우도 보는데 내가 미국에서도 가장 물가가 비싼 샌디에고에서 60만원 냈는데
아무리 시간이 좀 지났지만 100만원넘게 받는 건 바가지인 것 같다... 지금 우리학교 웨싸이트를 가봐도 올라서 700불(70만원정도)를 받는 걸로 되어있는데...
게다가 한국 음식은 쌀 같은건 진짜 미국 음식보다 싼데...
하여튼 1학년 때도 여러가지 기적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마다 나의 모든 스케쥴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관리 해주실것을 기도하였는데
혹시라도 두 가지 스케쥴이 겹쳐서 걱정을 하면 희안하게 한 가지가 저절로 취소가 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과목이 많아서 제출할 리포터가 거의 매주 있었는데
그날 리포터를 완성하기 못하면 희안하게 교수님이 휴강을 하시거나 무슨 일이 생겨서 리포터 내는 날짜가 연기되곤 하였다.
그리고 무지 피곤해서 오늘을 저녁에 수업안 갔으면 하는 날은 어김없이 휴강이 되었고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어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가 있는 데 수업이랑 겹쳐서
고민하고 있으면 그때도 어김없이 수업이 휴강이 되었다. 인턴을 하면서도 클라이언트와 상담을 하면 꼭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우심을 경험하곤 했다.
슈퍼바이저가 백인 여자였는데 나랑 슈퍼비전 하는 날마다 옷이 야해진다고 동료가 하루는 귀뜸을 해 주었다. ㅋ
안그래도 슈퍼바이저가 영화보러가자 하키보러가자 몇 번을 둘이서 업무 마치고 뭐하러 가자고 하는데 그 때마다 하필이면 교회가는 날이어서 거절을 해서 너무 미안한 마
음에 이번에 또 뭐 하러가자고 하면 이번에는 교회를 하루 빠지더라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차였는데 참 천만다행이었다.
미국에는 동성연애자가 워낙 많았다. 특히 우리 학교 사회사업학과 분야에서는 7-8명 당 한명이 동성연애자였다.
그래도 나는 그런 걸 본적이 없어서 옆에 그런 사람이 있어도 도무지 눈치가 없어서 미국 친구들이 나보고 다들 띵하다고 놀렸다.
그래서 1학년 1년 동안 인턴하는 기관에서 슈퍼바이져가 계속 괴롭히는 데 동료들이 나보고 끝까지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듣는 걸로 밀어부치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알아듣고 거절을 하면 인턴과목을 패스하지 못해서 석사학위를 따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주변에 동료들 중에서 슈퍼바이저의
성적인 요구를 거절했다가 인턴 과목을 패스하지 못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교회다니느라 그리고 동료들이 때 마침 조언을 해주어서 무사히 1년을 넘겼다. 내가 인턴하는 마지막날 그 슈버바이저가 송별파티를 하면서
나보고 딱 한번만 허그(포옹)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일상적인 인사인 허그를 문화적으로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교회밖에서는 거절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다고 했더니 그녀가 나를 포옹하고는 한~ 참을 울었다. 구슬피... ㅋ 표정관리하기 너무 힘들었다.
동료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눈치로 화이팅이라고 해주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그렇게 세밀하게 매 순간마다 도우시는 지 참 내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내가 미국에서 1학년 사회사업학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친 건 한 마디로 기적 그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