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폭한 여자- 김현주
*아래의 글은 김현주씨의 글입니다. 이 글로 인해서 제가 많은 에너지를 얻고 하루를 더 즐겁게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허락을 받고 글을 게재합니다. 다른 분들도 이 글을 읽으며 답답한 마음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을 경험하시길 기대합니다.
아침부터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다.
마냥 권태롭다 못해 짜증이 스멀대며 올라왔다.
싱크대에 널려있는 그릇들이 거슬린 나머지 설거지를 하다가,
기름기가 잘 닦이지 않는 밀폐 용기에 괜히 짜증을 내며 벅벅 문지르고 있다.
다 거슬렸다.
양 모서리의 균형이 맞지 않게 널려있는 극세사 행주를 눈흘김하고
사용할 때마다 플러그를 바꿔 꽂아야 하는 삽입구가 부족한 멀티탭도 싫증난다.
빨래를 걷다가 자꾸만 엉켜버리는 세탁소 옷걸이의 휘어진 대가리를 마구 때려주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오타를 연발하고 있는 노트북의 cursor에게 화가 난다.
도대체 한 줄을 제대로 완성할 수가 없다.
굼뜬 소처럼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cursor는 전진과 후진의 개념이 없다.
앞서며 가이드를 해야 하는 제 기능은 잊어버린 건지 글 쓰는 도중에 난데없이 몇 칸을 뒤로 가
엉뚱한 곳에 끼어있기를 한다거나 받침 따위는 제멋대로 생략해버리는 버릇이 없는 제멋대로 인
녀석이다. 진작에 패주었어야 했다.
더불어 노트북에 깔아 놓은 한글 소프트웨어는 쓸데없이 민감하다.
나의 맞춤법 실력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채점을 하며 빨간 밑줄을 그어대기 바쁘다.
ㅐ와 ㅔ가 틀렸다며, 접미사가 바르지 않다고, 익숙하지 않은 띄어쓰기에도 빨간 줄을 그어대는데,
어떤 때는 도무지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도 지적질을 한다.
나의 약간 강박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무서운 녀석임이 틀림없다.
그래 네가 갑이다!
글을 쓰는 이상 나는 이 참견쟁이 소프트웨어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싫증이 나는 참이다.
남편이 얻어 온 텃밭 채소들을 다듬어야 하는 것도 권태롭다.
아직 양미간의 주름은 가시지 않았다.
권태로운 나머지 뇌가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하다.
뿌옇게 해를 가리고 있는 묵은 이불솜 같은 회색 구름 마냥 내 머릿속도 잔뜩 흐려있다.
왜 권태를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주기적인 cycle로 돌아오는 기분인데 이런 기분을 느끼는 나에게도 싫증이 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상황을 분석하려는 나에게 격려를 해주고
조금씩 치료적 자세가 갖춰지는 자신을 칭찬한다.
* 그래도 채소를 다듬고 반찬으로 승화시키는 번거로운 일이 지금 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