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미- 헤이븐정신건강상담소&연구소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박사, 샌디에고주립대학교 사회사업석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12:15)

나의 이야기

고집 센 망둥어가 하나님을 만난 사연

하정미 2007. 9. 13. 16:43

1992년 가을 나는 지속적으로 머리가 아픈 것을 심각하게 느껴 종합병원을 찾았다. 그때는 동아대학교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알톨중독이 심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도망다니면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의 답을 듣고 이리저리 촉진을 해 보더니 대뜸 뇌종양인것 같으니 되도록 빨리 MRI를 찍어서 결과를 확인하자고 하였다.

    그날 MRI찍을 것을 예약하고 이제 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로 가서 친구들에게는 별일없다는 듯이 바쁘다고 이야기도 하지않고 사물함에 있는 모든 물건을 정리해서 자취방으로 가져와서는 MRI를 찍는 그 날까지 방 수석에서 멤돌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슬퍼해줄가? 그때 3살이던 딸 두리는 어떻게될가? 부모님이 잘 키워주시겠지... 내가 며칠째 학교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학교 친구들이 궁금해하지 않을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한번도 믿지 않았던 신에게 급한 마음에 하소연을 했다. 이번에 살려주시면 이전처럼 죽고 싶어하고 사는 걸 힘들어하지 않고 의미있게 열심히 기뻐하며 살아보겠노라고...

    2년 가까이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다니면서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했던 것이 전부 어리석게 느껴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피부로 와 닿았다. 그 동안 내가 너무 내 생각이 다 맞는 걸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내 생각이 이렇게 어리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들이 자취방에 찾아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의가 마치면 내 또래 예비역들에게 술마시러 가자고 하던 내가 며칠 씩이나 나타나지 않으니 이상하게 생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소대로 나는 경상도 사람의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의사가 뇌종양인 것 같다고 다음 주에 MRI를 찍자고 하네.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어"라고 했더니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다들 놀라고 어우운 얼굴로 뭐라고 해야할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했다. 그 다음 날 부터는 친구들이 교대로 와서 밥먹자고 대리고 다녔다.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그냥 평소처럼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밥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병원에 가는 날 친한 친구 두 명이 함께 가지고 나타나서 같이 병원에 가서 MRI를 찍고 결과를 들으러 진찰실로 갔다. 친구들을 밖에서 풀이 죽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담당의사가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오지 못했다면서 훨씬 나이가 많은 의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의사는 뇌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내가 보아도 뇌 속에 동전보다 큰 뭔가 동그란 것이 있었다. 속으로 저게 종양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의사가 뇌에 뭔가가 있긴한데 종양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고민을 평소에 너무 많이 했는지 어쩐지 뇌속에 있는 칼슘과 같은 성분들이 엉겨서 둥근 뭔가가 있긴한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거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허탈했다. 갑자기 내가 바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그런 상태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아무 병 아니래. 오진이래. 그러고 성큼 성큼 걸어가니까 친구들은 멍한 얼굴로 따라왔다. 

    그 일 이후에 서너달이 지나서 다시 나는 너무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나서 신에게 한 말들이 생각이 났다. 내가 얼마나 작고 한심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너무 내 머리만을 믿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며칠 후 학교 건물 벽에 붙은 광고에 미국 어학연수라는 글을 읽고는 바로 그날 저녁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미국에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가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바로 그 날부터 미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았다. 친구들이 그런 내 모습에 모두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과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내가 갑자기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하니까 모두들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동안 내 생활을 대충 알고 있던터라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가보다 하였다. 한 친구가 특히 나를 많이 지지해주면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가서 처음부터 배우면 더 좋다고 하면서 잘 하고 오라고 격려해주었다.

     졸업을 하는 해에 1월초에 미국으로 출발하였고 졸업식은 참석할 수 없어서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동안  계속 이혼할 수 없다고 하더니 마침 그때쯤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이혼수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로써는 너무나 다행스럽고 후련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학생들 대 여섯 명이 모여서 함께 샌디에고로 갔다. 모두들 얼떨떨한 마음으로 기대반 두려움 반으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다들 처음보는 얼굴들이었지만 앞으로 미국에서 계속 함께 학교에 다닐 거라는 생각에 금방 친구가 되었고 앞으로는 우리끼리 도와서 살아야 한다는 동지의식으로 마치 한 식구같이 생각되었다.

     미국에 도착해서 기숙사를 배정받고 보니 나무로 지어진 기숙사에 내가 배정받은 방에 혼자 앉아서 너무나 외롭고 주변에는 나무와 다람쥐와 작은 건물들밖에 보이지 않아서 마치 산속에 있는 통나무 휴양지에 혼자와 있는 듯 하였다. 금방 함께 간 한국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전 학기에 온 한국 학생들이 와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점들을 가르쳐주고 안내를 해 주어서 고마왔다.

    그 날 부터 나는 그 곳에서 세계 각 국에서 온 학생들과 오전에는 4시간 정도의 영어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고 학생들과 잡담도 하고 저녁에서 다시 학생들끼리 모여서 영어로 나오는 텔레비젼도 보고 수다도 떨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우리 학교에는 유럽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개방적이고 어찌보면 방탕한 생활방식이나 사고 방식이 나를 놀라게 하는 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같은 반에서 영어공부를 하던 유럽친구들은 하루는 나보고 질문을 하였다. 왜 매일 저녁 10시전에 자냐고. 혹시 수녀냐고. 자기들은 그때 쯤 되면 기숙사의 한 집에 모여서 파티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하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이상한 섹스파티를 하는데 처음에 한국 학생들 몇 명이 유럽학생들에게 초대를 받아서 그들의 파티에 갔다가 놀라서 나와버린 이후로는 피곤하기도 하였지만 그냥 그 시간이 되면 자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일찍 잤더니 유럽친구들이 보기에 좀 이상했나보다.

     그 곳에서 주변 학생들의 생활을 보면서 매일 도전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던 중 길욱이라는 한 학기 나보다 일찍온 한국 학생이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였다. 나는 성경공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파티하는 유럽친구들의 모임보다는 안심되고 그렇게라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따라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였다. 길욱씨는 요리솜씨가 좋아서 떡볶이 같은 한국음식을 준비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 모임에서 석민이라는 오빠를 만났다. 만나자 마자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서울에서 온 나보다 두 세살 많은 오빠였는데 대학다닐 때 ROTC출신이라며 말씨만 서울 말씨였지 태도는 나보다 훨씬 무뚝뚝한 편이었다. 석민오빠랑 길욱씨는 매일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저녁식사도 학교 식당에서 같이하고 주말이 되면 주일날 아침에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가려고 내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더 자려고 하고 두 사람은 나를 어떻게든 깨워서 데리고 가려고 하고 실갱이를 하다가 내가 결국 두 손들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다녔다기 보다는 차에 실려서 강제로 끌려갔다거 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 교회는 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였는데 한국 사람은 우리 세 사람이랑 미국에 이민와서 사는 미국 남자랑 결혼한 한국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전부였다. 맨 처음으로 주일성경공부반에가서 미국 사람들 틈에 끼어서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에 참석해서 영어로 설교를 듣고 한국 아주머니 댁에 가서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저녁 예배를 다시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하루는 한국인 2세인데 한국말을 5살 정도아이처럼 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서 그 사람과 점심식사후에 다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다른 분들이 내가 믿지 않고 계속 못 믿겠다고 하니까 한국 말로 성경공부를 하려고 일부러 그 사람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국인 아주머니집에서 몇 달을 한국어로 성경공부를 했지만 나는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따지고 들고 성경공부 인도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힘들게만 하고 있었다.

     길욱씨와 석민오빠는 답답해하고 계속 나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저녁 9시쯤에 길욱씨와 석민오빠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바다구경을 하러 가자고 끌고 나갔다. 라호야 비치라고 아주 경치가 좋은 곳이 있었다. 그 곳에 가면 방파제가 있는 데 한 쪽은 바다 사자가 우글거리고 반대편은 파도가 치는 곳이었다. 그 방파제의 좁은 부분까지 함께 걸어가서 바다를 보다가 갑자기 석민오빠가 내 어깨를 잡더니 "예수 믿을거냐 말거냐? 안 믿는 다고 하면 한쪽으로 밀어버릴거다"라고 하였다. 나도 그리고 같이 갔던 길욱씨도 너무 놀랐는데 다행이 길욱씨가 말렸다. 거짓으로 믿는 다고 하면 안�다고... 그리고는 무사히 그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일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길욱씨와 석민오빠가 얼마나 간절히 내가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왜 그러는 것인지... 얼마 후에 길욱씨는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하게 되었다. 길욱씨가 가면서 석민오빠에게 정미가 고집이 있지만 교회에 살살 잘 데리고 다니면 반드시 믿게 될거라고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 석민오빠는 걱정말라고 하면서 나를 보고 "넌 이제 죽었어"라고하면서 장난을 쳤다.

   길욱씨가 귀국하고 몇 주일 후에 석민오빠가 기화라고 하는 유타주에 사는 한국인 아주머니 한분이 나를 만나러 오실거라고 하였다. 그 아주머니를 통해서 석민오빠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오빠가 그 분에게 내 이야기를 했더니 직접 비행기를 타고 오시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석민오빠는 친구집에가서 자고 그 아주머니와 나는 오빠네 아파트에서 저녁 7시경부터 밤을 꼬박세워 성경공부를 하고 아침 7시경에 아주머니가 "지금까지 읽은 성경속의 말이 다 믿어지고 예수님이 정말로 너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것을 믿을 수 있겠니?"라고 물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순순히 "예"라고 대답했다. 함께 영접기도를 하고나자 아주머니가 이제 됐다고 하면서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하시고는 오빠랑 다 함께 식사를 하시고 우리는 헤어졌고 오빠는 너무 좋아하면서 우리가 다니던 미국교회에 가서는 모두에게 내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 주일 나는 모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침례를 받게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Light House Baptist Church라고 하는 미국의 아주 보수적인 독립침례교회였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들은 모두 긴 치마를 입고 다니고 남자들은 아이들까지 모두 교회에 올때는 넥타이를 하고 정장 차림이었고 내가 너무나 놀란건 그렇게 개방적이고 내 눈에 타락해 보이는 켈리포니아 그것도 샌디에고에 살면서 순결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런 모습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감격해서 울거나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아무런 감정적 반응이 없고 그냥 얼떨떨 하였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 아마도 내가 워낙 감정적이 그 당시에 매말라 있었고 무뚝뚝한 편이라 그랬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차차로 내 감정에도 간섭하여 주시어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당시 석민오빠는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그냥 무뚝뚝해서 많이 섭섭해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맙고 내가 그때 여러분들을 너무 힘들게 했다는 생가이 든다.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려고 얘쓰고 노력하지못했을 것 같다. 그 때의 일은 시간이 지날 수록 생각하면 할 수록 고마움이 더해지고 그 분들에게 다 갚을 수 없으니 내가 지금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최선을 다해서 대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혼을 하고 뇌종양이라는 오진을 받고 어학연수를 하게된 모든 과정이 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거쳐야만했었던 과정이었다는 생각이들고 그렇게 해서라도 교만하고 고집이 센 나를 만나주셔서 지금의 나를 있게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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