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샌디에고로 어학연수를 갔다. 함께 한국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랑 그 황량한 학교에 도착해서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그래도 한 학기 전에 온 한국사람들이 이모 저모로 많이 도와주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에서 영어공부에 힘쓰다 온 사람들이어서 반배정시험 성적이 좋아서 총 6레벨의 반 중에서 5레벨과 6레벨에 배정되었지만 나와 한 명의 한국 여학생만 2레벨에 배정되었다. 2레벨은 정말 단어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정도의 클래스였는데 다행인건 그 반에는 유럽과 남미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고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특히 친절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온 학생들은 문법이 약했지만 듣기 말하기가 훨씬 잘되고 읽는 속도도 빠르고 단어도 상당한 영어 단어가 자기말과 비슷해서 특히 과제를 할 때는 내가 하는 것보다 서너배는 빨랐다. 그래서 유럽 학생들은 오후에 해변에 가서 놀다가 저녁에 잠시 숙제를 하는 반면에 나는 오후 내내 도서관에서 과제와 씨름을 해야했다. 특히 스위스에서온 불어를 사용하는 같은 반 학생은 과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래서 그 친구의 사전을 보고 열받았다. 왜냐하면 상당한 양의 영어 단어가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인 불어와 스펠링이 한 개 정도만 다르고 꼭 같은 것이었다. 특히 어려운 단어일 수록 같았다. 그래서 상당히 좌절했지만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학교 카페테리아라고 부르는 식당에 가면 나와 친한 한 학기 일찍온 길욱씨와 석민오빠 그리고 같이 온 용재씨가 같이 도서관에 가자고 끌고 또 가면 정말 옆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심지어는 교대로 나의 공부를 가르쳐주고 용재씨는 사전 암기를 강조하면서 공부시작할 때 사전에 있는 단어에 줄을 한 100개 정도의 단어에 그어주면서 기숙사에 돌아갈 때까지 다 외우라고 강요하고 저녁 9시쯤 되면 확인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꿀밤을 때리기까지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강제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놀려고 간 어학연수가 완전 스파르타식 공부 코스가 되었다.
어쨌든 덕분에 나의 영어신력은 조금 씩 늘었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버릇을 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성민씨라고 하는 친구가 사회복지라는 분야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고 나도 그 친구 덕분에 사회복지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 사실은 나와 함께 같던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그 곳에서 성적이 오르지 않았는데 시작할 때 가장 영어를 못했던 내가 가장 많이 향상되었고 게다가 지금 내가 전공하게 된 사회복지 분야를 거기서 알게 되었으니 나 만큼 많은 덕을 본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른 한국 학생들이 성적이 향상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모래 시계"라고 하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한국 비디오 가게에 가면 한국 드라마를 비디오 테잎으로 만들어서 빌려준다. 하루는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요즘 일주일 이상 한국 학생들이 너 말고는 안보인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라서 수업마치고 알아보니 한 기숙사에 모두 모여서 카페테리아 갈 시간도 아까와서 그 비싼 라면을 끊여먹으면서(그 당시 그 곳에서는 한국 라면을 무지 비싸게 팔았다) 일주일 넘게 그 드라마의 비디오를 몇 상자 빌려와서는 보고 있는 것이 었다. 그 모습들이 모두 완전히 폐인이 따로 없었다.
나는 다행이 내가 공부에 의지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길욱씨와 그 학교 MBA학생이었던 석민오빠한테 잡혀서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워낙 영어를 못해서 그럴 마음도 아니었고... 특히 그곳에 도착하고 일주일만에 같은 반 친구인 스위스에서 온 마크라는 친구가와서 파티같이 가자고 해서 일단 친구가 되려고 좋다고 했는데 막상 9시쯤 그 친구가 와서 둘이서 파티를 하는 기숙사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한 마디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심한 불어 엑센트로 못하는 영어를 하고 내 영어는 뭐 2레벨이면 정말 엉망이고... 그래서 서로 좌절하고는 일찍 돌아왔던 악몽때문에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 친구 정말 잘 생기고 관악기 연주도 잘하고 로멘틱한 친구였는데... 게다가 나에게 상당한 관심도 표현했었는데... 서로 말이 안통해서... ㅋ
우리 학교는 학교넓이는 상당히 넓었다. 완전히 산 속에 작은 목재건물이 띄엄 띄엄있는 학생 수나 규모는 작은 학교였다. 밤에는 다른 기숙사에 놀러갔다가 올때는 남학생들이 반드시 데려다주어야했다. 왜냐하면 완전 산 속이라서 늑대나 산표범같은 동물이 나올 수 있다나... ㅋ 우리반 담임선생님은 나보고 특히 체구가 작으니까 조심하라고 겁을 주었다. 교실도 매우 작았고 한 반에 10명 정도 였고 카페테리아는 부페식이어서 골라먹을 수 있었지만 한국 음식과 많이 달라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한 달 정도 지난 후 부터 이가 아팠다. 아마도 음식이 바뀌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미국인과 음식 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비행기에 타면서부터 한국이랑은 완전히 다른 냄새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는데 그 울렁증이 한 달이상이나 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자볶음이랑 오렌지랑 계란 후라이 조금만 먹고 버텼다.
게다가 학교 도서관은 사시사철 어찌나 에어컨을 많이 틀던지 항상 가죽점퍼를 허리에 두르고 다니다가 도서관에 들어가면 입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는 옷을 허리에 걸치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다. 도서관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거의 우리가 전세를 낸 것 같았다. 의자랑 시설이 좋고 바닥에도 카펫이 깔려있어서 아늑하고 공부하기는 정말 좋았다. 간혹 낮잠자기도 너무 좋고... 또 도서관 사서랑 농담따먹기 하면서 영어신력을 늘이기도 딱 좋았다. 도서관 사서도 안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우리가 말을 걸면 너무 좋아하였다...
기숙사 앞에는 풀장이 있었는데 오후가 되면 유럽학생들과 남미 학생들이 비키니 수영복도 거의 벗고 일광욕을 하였다. 처음에는 한국 학생들이 모두들 너무 놀랐지만 매일 보니까 한국에서 온 남학생들도 바다사자가 해변에 누워있는 것 처럼 취급하였다. 유럽친구들이 나중에 나한테 한 황당한 질문 중 한 가지는 "너는 혹시 몸에 심한 흉터가 있냐? 였다. 내가 한번도 벗고 일광욕을 하지 않고 짧은 바지를 입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프랑스에서 온 덩치가 크고 좀 우습게 생긴 약간 미스터 빈을 닮은 남학생이 갑자기 나보고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태권도 근처에도 간적이 없는데 내가 가끔씩 손까락으로 뼈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걸 보고 내가 태권도 고수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전혀 태권도를 못한다고 거절하자 영화에 보면 정말 고수는 못한다고 하고 안가르쳐주고 애를 먹인다고 하면서 계속 졸랐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도망다니느라 상당히 애먹었다.
남학생들은 주로 유럽에서온 학생들이랑 둘이서 한 방을 쓰기로 배정받았는데 한국 학생이 더 힘이 세면 외국인 룸메이트가 쫏겨나고 한국 학생이 약하면 한국 학생이 쫏겨나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유는 유럽에서 온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데리고 방으로 와서 자는 것이었다. 한번은 잘 아는 한국 남학생이 베개를 들어 처량하게 밖에 쪼그리고 �아있는 걸 발견하고는 왜그러냐고 했더니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 기숙사에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자라고 한 적도 있다. 그곳 기숙사는 방 두개 욕실하나 그리고 거실로 구조가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타이완에서 온 이름이 "이치"라는 친구랑 방을 �고 옆방에는 한국 여학생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학생이 있었다. 그 오스트리아 여학생과 나는 앙숙이었다. 이유는 에어컨 온도 때문에... 그 친구는 무척 싸늘한 걸 좋아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춥다고 해서 에어컨디셔너 온도조절 문제로 매일 다투었다. 내가 조금 더 기가 세어서 결국 옆방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자고 온도는 우리에게 맞도록 되었다. 아마 내가 안돼는 영어로 바디랭귀지섞어서 강력히 우기지 않았으면 한 명 때문에 세명이 떨뻔 하였다. 그 오스트리아 여학생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강하게 해서 다른 여학생 둘은 꼼짝을 못했지만 나는 작지만 나름데로 깡이 있는지라... 타이완에서 온 착하디 착한 내 룸메이트는 매일 아침 그 오스트리아 여학생에게 머리카락 흘렸다, 세면대 쓰고 물을 안닦았다 등의 이유로 구박을 받고 가끔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매일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아마도 문화적 차이나 체질의 차이가 무지하게 서로 적응하기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루는 카페테리아에가서 식사를 하는 데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었다. 토요일날에는 볶음밥을 해 먹을 수 있게 조리기구를 내준다. 그래서 각종 야채랑 미국식 날라가는 밥을 섞고 양념을 넣어서 한국식이랑 그나마 비슷한 볶음밥을 해 먹었다. 그날은 내가 먼저 와서 다른 한국 학생들과 함께 먹으려고 볶음밥을 했다. 그래서 모두들 나눠 먹는데 한국 학생들 중에서 몇 명이 주로 유럽아이들이랑만 이야기하고 우리 한국학생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학생들과 함께 있던 유럽학생이 자기들끼리 우리를 쳐다보고 낄낄거리더니 갑자기 우리에게로 와서는 한번 자기도 볶음밥을 먹어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접시에 덜어서 주니까 한 입 먹더니 바로 그자리에 뱃어버리고는 돌아가서는 자기들끼리 막 더 큰소리로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매우 예의가 없는 태도였고 게다가 같이 있던 한국 학생들은 우리가 굳이 미국까지 와서 한국 음식 먹고 싶어서 궁상맞게 그런다고 비웃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나중에 몇 달후에 복수의 기회가 왔다. 내가 한국 식당에 갔다가 김치찌게가 남아서 싸왔는데 갑자기 우리가 한국 음식 먹고 싶어한다고 비웃던 한국 학생 두명이 와서는 자기들 그 김치찌게 냄새맏고 너무 먹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면서 남은 음식이라도 좀 주면 안돼겠냐고 무척이나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하였다. 그래서 속으로 무척이나 통쾌해 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 이후로는 학교에서 오다 가다 만나도 깍듯하게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 전에는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었는데... 역시 자기 문화를 무시하면 안�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다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확실히 나는 하나님이 도우시나보다 내가 좀 부족해도 항상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를 도와준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성경말씀이 꼭 맞다는 걸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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