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미- 헤이븐정신건강상담소&연구소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박사, 샌디에고주립대학교 사회사업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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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회사업

고 장기려 박사 -의사/사상가/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을 통한 청십자 운동

하정미 2019. 1. 11. 19:39


장기려 박사 리포터.ppt

고 장기려 박사 -의사/사상가/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을 통한 청십자 운동

 

하정미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사상

 

1. 장기려 박사의 생애

2. 의사 장기려

3. 독실한 크리스챤 장기려

4. 사회사업가 장기려

 

 

III. 청십자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 운동

 

IV. 나가는 말

 

-참고문헌

 

 

 

 

 

 

 

 

 

I. 들어가는 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 동안 좌절하고 실망하고 우울해 하고 있었던 중에 이번 리포터를 쓰기 위해서 복음병원의 초대 원장이며 사상가 그리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성산 장기려 박사(1911-1995)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같은 크리스챤으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마음에 큰 감동을 받게 되고 내가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생애를 고찰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그 동안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좌절하고 힘들어 했던 것을 부끄럽게 느끼게 되었으며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잠시나마 함께 이 하늘 아래에서 그 분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깊은 감격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는 지금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나를 소생시키심에 무한한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II.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사상

 

1. 장기려 박사의 생애

 

장기려 박사는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아버지 장운섭, 어머니 최윤경의 차남으로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했으며, 부산외과학회를 창립하여 의학 연구에 공적을 남겼다(지강유철, 2007).

어린 시절 장기려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조모와 부친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조모(이경심, 1851-1922)는 그가 일곱 살 때까지 한 이불에서 간이 잠을 잤고, 그를 업고 예배당에 다녔으며, 아침과 저녁의 가정 예배를 인도하며 기도할 때마다 “이 금강석(애칭)이가 자라나 하나님과 현실나라에서 크게 쓰여 지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김병우, 2005). 장기려는 또한 ‘나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할머니의 믿음과 기도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하여 옛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을 성격의 인물과 동일화시켜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고 술회하였다(장기려, 197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병원, 간질환자들의 모임 ‘장미회’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 창설 등은 그가 평생 동안 무엇에 소망을 두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증언해 준다(지강유철, 2007).

아내 김봉숙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으나 6/25전쟁 때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게 된 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복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다(지강유철, 2007).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온전히 이웃을 위해, 이웃과 함께 살아온 그의 묘비에는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지강유철, 2007). 그는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거짓을 저주받을 짓’이라 여겼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았다. 진실과 정직을 포기하느니 감옥행을 결심할 정도였다(지강유철, 2007).

부산 사람들은 보통 ‘복음병원에 간다’고 말하지 않고 ‘장 박사한테 간다’고 했다(지강유철, 2007).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지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이 증대될 뿐 아니라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며,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공적 삶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사명을 자각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 결심을 변치 않고, 실천 매진하는 데 있다. 그 일의 성과와 가치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국민 대중에게 돌리라(장기려, 1980).


2. 의사 장기려

 

장기려는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의성학교에서 교원이 되려고 하기도 하였고 공업이 국가 사회를 이바지 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여 여순공과대학에 지원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환경이 어려워져 경제적인 이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 장인 김하식의 권유로 백인제 선생의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고 후복막 봉과직염과 패혈증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940년 3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고, 그 해 9월에 나고야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았다(청십자통감, 198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그는 1940년 3월 기홀병원으로 불리기도 하는 평양의 연하기독병원 외과 과장을 역임하면서 여러 시련을 겪었지만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평양기독병원에서 그리고 평남 제 1 인민병원장 겸 외과과장, 김일성 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강좌장(교수겸 외과과장)으로도 일하였으며 1948년에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남하한 후 장기려는 그가 25년 동안 수고한 일터인 복음병원의 전신인 영도에 있는 제 3교회 창고에서 근무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와 부산대학교 외과대학 교수 및 학장, 그리고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학 교수로 봉사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이상규, 1996;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장기려 선생은 의학자로서 학문연구에도 최선을 다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잠자리에 늦게 들어도 4시면 일어나 경건의 시간을 갖고 의사들에게 가르칠 강의 내용을 확인한 뒤 의사들과 미팅을 끝내고 6시 30분에는 회진을 돌았다. 40대 후반 이후부터는 부산-서울을 왕래하는 겸직교수와 오전 오후에 각기 다른 병원 환자를 보는 겸직의사로 일했다. 선생의 차남 장가용 박사가 회고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의학공부는 철저하게 하셨다”는 것이다(지강유철, 2007). 그는 받은 편지에 즉시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1992년에 뇌혈관 경색으로 쓰러진 뒤 오른손에 마비가 온 이후부터는 꼭 답장을 해야 할 경우 대필을 부탁했다(지강유철, 2007).

그는 미개척의 의료연구에도 각별한 열정을 바쳤다. 1959년 2월 24일 인체간암에 대해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실시해서 성공하였고, 그 후에 4가지 예를 추가하는 연구로 1961년 대학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김병우, 2005).

3. 독실한 크리스챤 장기려

 

장기려 박사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다간 사람이었으며 이것이 그의 일생동안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드러나며 자신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의 독실한 신앙과 기도의 영향력을 받은 장기려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러한 환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훗날 장기려는 조부의 치부가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아버지가 잘못도 없이 재산을 다 날린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김병우, 2005). 송도고보에 입학한 장기려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여 2년을 보냈다. 3학년이 되어서야 ‘하나님의 시간을 도적질하고 부모님이 주신 학비를 남용하고 있는 불효막심한 자식’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공부에 열중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때 장기려는 전 인격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였다(장기려, 1985;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그는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선생을 배출한 보수적인 산정현교회에서 40년 이상을 장로로 봉사했으며 해방 후 북한 공산치하에서 5년을 지낼 때 일요일에는 꼭 교회에 나갔고 반드시 기도를 드리고 나서야 수술을 했지만 김일성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의사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탄압을 덜 받을 수 있었다(지강유철, 2007). 병원의 재정이 열악할 때 허구한 날 월급을 털다시피 하여 병원 물품을 구입하였으며 때문에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어린 6남매는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정부가 수여한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는 가재도구를 하나씩 팔아야 살림이 가능할 정도였다(지강유철, 2007). 1947년 말 우리로 치자면 대통령상에 해당하는 모범일꾼상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환자를 치료했기에 받은 상이라고 하여 상금 전액을 교회에 헌금하였다(지강유철, 2007). 그리고 월남한 뒤로는 이미 1968년부터 민족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지강유철, 2007).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해 ‘부산모임’을 만들었고 기관지를 만들어 발행했으며 모임을 주도하였다. 그의 실천사상은 철저히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김병우, 2005). 그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며 신앙과 삶을 통해서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추구하였다. 전쟁 중 복음병원을 시작하게 된 동기 또한 ‘의사가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겠다’며 하나님께 서약했기 때문이었다(김병우, 2005). 많게는 하루 2백여 명을 진료하고 천막병원에서 나무로 짠 수술대위에 사람을 눕히고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고 그는 고백하였으며 ‘사랑의 동기가 아니면 삼가라’는 분명한 철학으로 살았다(청십자통감, 198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그는 현대인들은 사랑의 가치는 알지만 진정한 사랑은 모른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참 사랑이 아니라 사이비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면서 그것에 도취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은 죽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장기려, 1974).

 

그의 실천적인 사회봉사는 물론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 또한 비기독교인들을 섬기려는 것이었다(지강유철, 2007). 그는 그의 사회복지 실천사상의 원동력은 바로 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기독교적 가치인 사랑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청십자운동이었다(김병우. 2005).

 

4. 사회사업가 장기려

 

1959년에는 행려병자들을 위해 다른 몇 몇 의사들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만들었으며 기독교정신을 사회복지에 실현시킨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1968년 발족시켰다. 평등정신을 바탕으로 시작된 청십자조합은 서비스의 수혜자에게 낙인을 주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있는 조직이므로 주민의 자조정신을 최대한 존중하였다(김병우, 2005). 그러므로 개인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최대한으로 인정하고 기회의 균등과 사회연대성을 강조하는 사회복지의 가치체계와 이념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 것이다(김병우, 2005).

복음병원이 무료병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1명의 직원을 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개혁교호선교부로부터 매월 5백 달러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지강유철, 2007). 원장인 선생의 병원 식구 계산법은 독특했다. 11명 뿐 아니라 딸린 식구까지 모두 합친 44명을 병원 식구라고 생각하여 월급책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직원들의 월급을 직급, 학력, 경험 등의 일반적 기준이 아니라 가족 수에 따라 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식구 수가 같은 원장과 운전기사의 월급이 똑같았다. 선생이 그렇게 정한 것은 복음의원을 진정한 공동체로 만들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지강유철, 2007).

그는 사회복지의 목표를 하나님나라로 설정하였고,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복음을 강조하면서, 구원이 개인을 포함하여 사회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실제적인 실천 즉 사회봉사로 이루어진다고 결론지었다(이상규, 1996;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장기려는 또한 “가난한 자”를 사회복지의 대상으로 하였다. 그의 관심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건강을 증진하여 복지적 자존의 기틀을 다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장기려, 198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가난한 이들이 평등하게 의료적 혜택을 누리고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장기려가 꿈꾸는 이상이었다(김병우, 2005). 그는 평양에서든 부산에서든 자신의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했다. 겨울에는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 주고 들어오기 일쑤였다(지강유철, 2007). 그가 6/25전쟁 이후 우직스럽게 무료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아미동에 있는 부산의대 병원 뒤편 창고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간질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섬겼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만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선생에게는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지강유철, 2007).

 

III. 청십자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운동

 

1968년 2월 장기려의 집에서 모여 성경공부를 하던 ‘부산모임’에서 농촌운동가이던 채규철이 덴마크에서의 유학기간 중 경험한 사회보장제도를 소개하면서부터 조합설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후 이를 시행하기 위하여 자료수집부터 조합설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김병우, 2005). 이후 이를 시행하기 위하여 자료수집 및 조사에 착수하였고, ‘청십자(Blue Cross)'라는 명칭을 택하였다. 4월 11일 정관초안을 만들고 부산시내 백여개 교회에 취지문과 정관초안을 보내어 23개 교회 대표자들이 참여하여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회원으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 태동된다(장기려, 198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청십자조합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기 10년 전에 이루어진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기구였다(김병우, 2005). 1976년에 의료보험법에 의한 특수법인인 ‘한국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장기려, 1985;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장기려의 또 하나의 실천사상은 사회적 평등이었으며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이타적 생활방식은 기독교 정신이 그 바탕이었다(김병우, 2005). 여기에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충분한 이해를 통하여 조금 양보하고 다소간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나아가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김병우, 2005). 이것이 곧 청십자조합에 반영된 것이다. 청십자조합의 빈곤문제 해결노력은 그 설립배경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빈곤의 여러 원인 가운데 서로 힘을 모아 질병발생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해결하자는 것이 청십자운동의 취지인 것이다. 청십자조합은 이렇듯 질병의 퇴치와 빈곤예방의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김병우, 2005).

빈곤계층을 위한 청십자의 노력은 청십자사회복지회를 통하여 더 구체화 되었는데, 영세주민을 위한 건강관리소를 통한 모자보건 및 가족계획, 영유아 예방접종 및 건강상담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전문 사회사업가가 상주하여 가정문제 상담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어려운 학생들 위한 장학금을 지급하고 양로원과 무료진료사업도 꾸준히 전개하였다.

청십자운동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순수 민간에 의해 시작된 의료보험조합운동이며 사회복지운동이다. 특히, 청십자조합은 1989년 지역의료보험이 전면 실시되기 전 20여 년 동안 빈곤층의 건강과 복지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국가의 의료보장체제가 완비되지 못한 시대에 그 제도적 공백을 채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청십자운동은 의료계뿐 아니라 교육계, 종교계, 경제계 등 자발적인 주민조직화를 통하여 빈곤과 건강문제에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지역복지 운동사적 측면에서도 좋은 선례를 남겼다(김병우, 2005).

 

지역사회조직론의 관점에서 청십자운동을 분석한 결과(김병우, 2005)

 

1. 지역사회주민들을 조직화하고 이를 통하여 지역사회가 당면한 의료 및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 지역사회조직사업의 모범을 제시해 주고 있다.

2. 초기 조직의 형성기에는 우리나라 보건의료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청십자조합을 위한 실무진들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지역주님의 표현된 욕구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집약하여 널리 인식시키며 잠재적 구성원인 주민들을 다양하게 접촉하였고 조직화 촉진 집단을 구성하여 조직을 출범시켰다.

3. 조직의 토대를 구축하는 시기에는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추진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지역사회의 공식, 비공식 지도자를 발굴하고 참여시키는 일은 조직의 형성기에서부터 노력해 왔다. 또한 청십자소식이라는 자체 홍보물과 지역대표자회의, 운영위원회, 간담회 등을 통하여 활발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 통로를 개발하였다.

4. 조직의 발전기에는 구조가 안정화되고 지역사회에서 신뢰가 쌓이면서 물적, 인적 자원이 확보되면서 역량이 향상되었다. 특히 활동을 평가하기 위하여 운영위원회가 생기고 외부용역을 통하여 전문적인 평가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지도력을 갖출 훈련과 교육을 실시하였다.

 

청십자조합의 지역사회복지사업 성격(김병우, 2005)

1. 수익지향이 아닌 조합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이념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이었다.

2. 복지사업은 조합원과 지역주민(비조합원)을 대상으로 하였다.

3. 복지사업은 지역주민과 조합원의 자발적인 참여와 통합적 활동에 의한 능동적인 자조노력과 협동을 토대로 지역주민과 조합원의 공통적인 욕구와 사회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하여 추진되었다.

4. 복지사업은 청십자조합과 지역주민을 직/간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체였다.

5. 복지사업은 단순히 지역주민과 조합원의 태도변화와 물질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조합원의 통합된 활동을 토대로 지역 및 조합원의 공통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련의 체계적 공동 활동이었다.

6. 청십자조합의 복지사업은 보험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보완해주는 것으로 청십자조합의 발전, 지역주민 및 조합원의 통합화와 조합에 대한 의식변화를 창출하는 기반이었다. 따라서 청십자조합의 복지사업은 조합이윤의 소비가 아니라 조합발전을 위한 일종의 투자이며 사회적 환원이었다.

 

자영자조합으로서 청십자조합은 많은 의료보험운동을 선도하였고 ‘청십자’라는 명칭과 정관을 전파하는 등 자영자조합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직영의 청십자병원을 통하여 건강유지기구의 한 정형을 이루어 내는 효과를 가져왔다(김병우, 2005). 이는 의료의 공급 및 전달제도의 조직화와 종합적인 치료봉사 그리고 지역 내 주민들의 자조/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의료제공자인 의료진과 의료 소비자인 조합원, 의료보험조합이 삼위일체를 이룬 가운데 인간의 모든 의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의료전달제도라 불린다(청십자통감, 1989; 김병우, 2005에서 재인용).

청십자운동의 경험이 갖는 실천적 함의는 지역사회에 기반 한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여 정책의 결정과 시행을 이끌어내어야 하는 지역사회중심의 사회적 상황을 맞고 있는 이때에 청십자운동의 경험은 지역사회조직사업의 훌륭한 모범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청십자운동의 경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지역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민간지원체계를 통한 보완적인 기능이 어느 때 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인적, 재정적, 시설적 자원 면에서 활용 가능성이 많은 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청십자운동의 경험을 살려 지역사회복지의 민간지원체계로서 기능을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것이다(김병우, 2005)

 

 

IV. 나가는 말

 

장기려 박사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삶 속에서 실천하려도 노력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그리스도인이며 성실하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몸 바친 의사이며 그리고 사랑과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였으며 청십자운동을 통해서 지역사회복지를 실천한 훌륭한 사회사업가였다.

청십자운동의 사회복지적인 의의(김병우, 2005)

 

1. 청십자운동은 사회복지운동의 개념에 충실하였다. 청십자운동은 조합구성원들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아 삶의 질을 높이고자하는 목적으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른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운동의 선구적 사회복지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청십자운동은 주민 스스로의 욕구를 바탕으로 주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지역사회조직방법을 적용한 지역복지운동이었다. 청십자운동의 성공적인 발전은 지역복지가 강조되는 오늘날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지역사회조직의 좋은 모델로 평가될 수 있다.

3. 청십자운동은 청십자사회복지회를 통하여 지역사회복지사업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특히 제도에서 소회되었던 저소득계층의 복지와 보건향상을 위하여 지방비와 국비를 지원 받는 등 공공기관의 기본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다는 측면에서 사회행동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

4. 청십자운동은 지역사회의 빈곤문제 해결에 기여한 바가 크다. 당시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질병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빈곤계층의 복지적 자존을 높이기 위하여 장학금지급, 건강관리소, 무료독서실, 상담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5. 청십자운동은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 순수민간에 의해 국가의 제도적 공백을 매운 의료복지운동이었다. 1960년대 정치 경제적 논리에 희생당하던 소외계층의 가장 큰 욕구였던 의료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나아가 자영자조합 및 2종 의료보험조합의 관리, 운영방법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6. 청십자운동은 설립자 장기려의 실천사상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되어질 수 있다. 장기려의 실천사상은 기독교적 사랑과 사회적 평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장기려는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그의 실천사상을 실천하고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의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삶과 실천은 어려운 현실에 고민하는 많은 사회복지사들에게 많은 영감과 의미를 주고 귀감이 될 것이며 지금의 지역사회복지의 나아갈 바에 대해서도 많은 점을 시사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병우(2005), 지역사회조직론의 관점에서 본 청십자조합의 의의에 관한 연구, 인제대학교 석사논문.

이상규(1996), 장기려 선생의 신앙과 사상. 성산장기려 박사 일주년 추모강연회.

장기려(1974), “유물론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한의 사랑의 철학”, <부산모임> 제 4호.

장기려(1979), 크리스챤의 가정교육, 부산모임.

장기려(1980), “성공적 생활을 위하여”, <부산모임> 제 76호.

장기려(1985), 회고론-인생론, 규장문화사.

장기려(1989), 청십자의료보험사업의 전개과정과 향후의 과제, 의료보험100호-89.06, 의료보험연합회.

지강유철(2007),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청십자통감편찬위원회(1989), 청십자통감.


장기려 박사 리포터.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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