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미- 헤이븐정신건강상담소&연구소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박사, 샌디에고주립대학교 사회사업석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12:15)

나의 이야기

교통사고로 인한 가족의 상실...

하정미 2007. 10. 1. 21:00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가기 전 겨울에 설날이었는지 1월1일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명절이었다...

 

부산에 있는 외갓댁에 온 가족이 갔다가 저녁 해질 녘쯤에 창원에 도착했다...

 

당시 창원은 막 개발되는 시기였고 우리 집은 창원 대로 근처에 있었다.. 당시에 창원대로는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그 큰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는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을 그냥 손을 들고 건너야했다... 차들은 얼마나 쌩쌩 달리는 도로였는지...

 

당시에 그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침에 외할아버지가 어제 꿈이 너무 좋지 않다고 오늘 가지말라고 했지만 사정상 와야했다...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고 어머니와 나보다 두 살 아래의 동생이 손을 잡고 창원대로에서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뛰셨다... 나는 아버지 손을 끌여서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승용차 한데가 어머니와 동생을 치었다...

 

마침 버스가 한대 정류장에 멈추어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있던 중이라 목격자가 무지 많았다..

 

나는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와 동생을 택시에 태워서 바로 병원으로 가셨다...

 

어떤 동네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갔다... 옆집 아주머니가 같이 자자고 했다... 이틀을 옆집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전화를 하셔서 엄마랑 동생이 다 잘 지낸다고 하셨다..  

 

옆집 언니가 텔레비젼 뉴스에서 우리집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 동생이 죽었다고 했다.. 나는 언니에게 거짓말이라고 소리쳤고 아주머니가 언니가

 

잘못안거라고 하셨다...

 

창원에 살던 삼촌이 데리러 왔서 그날은 삼촌이랑 숙모 사이에 끼어서 잤다...  숙모가 아침에 하시는 말씀이 자면서 내내 "엄마 괜찮아"라고 헛소리를 하더라고...

 

그리고는 외할아버지가 데리러 오셨다... 그래서 한 달을 외가에서 지냈다... 마침 방학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동생은 어머니랑 병원에

 

잘 있다고 걱정말라고 했다... 한 달만에 아버지가 오셔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한다고 가자고 하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동생은 죽었고 어머니에게는 나하고 외가에서 동생이 잘 지낸다고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가 속상하실 가봐... 외할머니나 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리고 어느 누구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가서도 울지 않았다... 그 뒤로 어머니는 몇 달을 더 병원에 계셔야했다... 나는 병원에서 어머니랑 같이 지냈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어떤 친척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이제는 사람구실을 못하니 이혼을 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일축하셨다... 아버지의 그 말이 일생동안 내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어머니랑 나를 배신거나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다들 못 살거라고 그리고 살아나더라도 정상인이 되기 힘들다고 했지만 건강을 회복하셨다...

 

어머니가 퇴원을 하시면서 아버지가 동생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는 상당한 기간 동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간을 보내셨다...

 

나는 그 이후로 너무 담담히 지냈다... 그냥 감정이 별로 없는 것 처럼...

 

그러나 대학생이 될 때까지 깜짝 깜짝 놀라고 피를 보거나 피라는 소리만 들으면 현기증이나고 혈압이 떨어지는 것 같고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때 길을 건널때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길을 건넜으면 동생이 죽지 않고 대신 내가 죽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비합리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에게 예전에 못 대해 준 것들이 계속 생각나면서 죄책감에 계속 힘들었다... 동생이 내가 친구들이랑 놀러갈때 따라오려고 하면

 

귀찮다고 구박한 것 잘못한 걸 동생에게 떠넘긴 것 그 때 동생이 울던 모습등이 머릿 속에서 오랜 동안 맴돌았다...

 

마음에 고민이 많아서 그랬던지 그리고 아기때부터 건강이 나빴고 대학에 갈때 까지 온갖 병치레를 다했다...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항상 내 기색을 살피면서 아프면 집에가라고 했다...  그냥 두면 가끔씩 쓰러지니까... 지레 겁먹고..

 

예방접종을 여러번 맞아도 면역이 잘 생기지 않아서 장티푸스랑 수두를 세번씩 했고 볼거리는 중학교 때까지 해마다 한번씩 치렀다...

 

미국에 유학가서는 면역이 없어서 아기들이 맞는 예방주사를 몇 번이나 계속 맞아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사회복지상담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 때 내가 그랬던 것이 외상후 스트레스라는 정서장애의 증상들 중에서

 

일부분이 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동생이랑 나는 당시 동네에 있던 작은 교회에 다녔다... 주일마다 손을 잡고... 그해 크리스마스때에는 창원에 있는 39사단에 교회에서 공연을 갔었다..

 

나는 한복을 입고 개회인사를 하기도 했었다.. 부끄럼을 많이 타서 외운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서있다가 내려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교회에 다니다가 그 사고 이후로 안다닌 것 같다... 그런 사고를 막아주시지 않고 어린 동생을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우여곡절끝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어느 순간엔가 동생은 그때 예수 믿었으니까 지금 천국에서 나보다 더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일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이 더 성장하고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마음속의 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예수님을 만나고 차차로 사라졌다... 그리고 차차로 무딘 감정이 살아나고 울줄 모르던 내가 어느 순간 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피에 대한 과민 반응도 차차로 줄어들고... 하나님께서 내게도 울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찾으셔서 만나주시지 않았으면 아직도 나는 그 괴로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상담을 전공하고 상담을 미국에서 몇 년이나 했지만 중이 제 머리를 못 깍는다고 내 문제를 그런 방법만으로는 이만큼 깨끗하게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상담기법으로 깨끗하게 치유받기란 정말로 힘든 일이라는 걸 내가 겪어봐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말이 안돼는 거라도 본인에게는 너무 심각하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다는 걸 내가 몸소 겼었으므로...

 

아마도 내가 상담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내가 그런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서 나에게 주신 말씀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