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미- 헤이븐정신건강상담소&연구소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박사, 샌디에고주립대학교 사회사업석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12:15)

실천기술론

동서대학교 이송민학생의 욥기 분석

하정미 2016. 4. 14. 22:08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다독이라 할 수는 없지만 1년에 7권정도의 책을 읽는다. 그동안 나름대로 다양한 장르의 독서를 시도해왔는데 종교 관련 서적을 읽은 적은 없다. 무교이기 때문에 시도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발적인 시도는 아니었으나 처음 접해본 성경 속 지혜문학 욥기는 신선했다. 그리고 어려웠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주신 재구성본을 읽었는데도 그러했다. 성경으로 읽어볼까 고민했지만 자살생각에 관한 교수님의 논문을 보았을 때, 욥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자료를 첨부해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처음 정독했을 때, 나는 욥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욥은 정직하고 신실하여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기에 사탄은 그를 시험에 들게 할 대상으로 삼았고,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몸만은 건드리지 말라하여 가족과 재산을 모두 빼앗았고, 다음에는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말라하여 온몸에 종기가 나게 하여 건강을 빼앗았다. 그래도 그는 신앙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듣기를 원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바랄 뿐이다. 욥기 13장에서 욥이 이러한 말을 한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무력함과 억울함을 호소할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앙 또한 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욥의 신실함을 믿기에 하나님이 사탄과의 내기에 응한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희생당한 욥의 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후의 내용이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이러했다. ‘욥이 시험 하에서도 충실한 행로를 끝까지 유지하자, 하느님은 욥과 논쟁을 벌였던 세 동무를 위한 제사장으로 욥을 임명하셨으며, 욥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셨다. 욥은 다시 훌륭한 가정을 갖게 되고, 이전에 소유했던 재산의 두 배를 갖게 되었다. 그의 친족과 이전의 동료들이 모두 다시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에게 선물을 가져왔다. (욥 42:7-15) 그는 오래 살면서 아들들과 손자들을 사 대까지 보았다. (욥 42:16)’ 모든 것이 시험에 들기 이전보다 좋아졌지만 글쎄, 정말 이대로 좋은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욥이 아무리 전보다 더 많은 재산과 자식들, 많은 이로부터의 존경을 얻었다고 해서 욥이 겪은 고통들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남을 가능성이 다분한 사례로 보인다. 사탄의 시험 하에서도 욥이 충실한 행로를 유지하자 하느님이 욥을 이전 상태 이상으로 회복시켜주셨다고 했는데,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잃었던 욥의 고통을 과연 새로운 자녀들로 대체할 수 있는지가 가장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 정독을 했을 때는 욥의 세 친구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대화상황을 상담이라고 가정했을 때, 욥에 대한 세 친구의 상담태도가 눈에 띄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천기술론 수업 2주차였던가. 수업에서 Biesteck의 case work 단계의 기본원칙을 배웠다. 그 중에는 비심판적 태도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상담자는 클라이언트를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한탄을 ‘궤변, 헛소리, 쓸모없는 이야기’로 일축한다. 감히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는 거냐며 욥을 비난하고 심판한다. 욥의 친구들의 비삼판적 태도가 드러나는 구절은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8장에서 친구 빌닷의 말이다.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 자네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자네 자식들이 주께 죄를 지으면, 주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재산, 가족, 건강. 모든 것을 잃은 친구에게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가 있는지 읽고 있던 내 눈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재산과 건강은 회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만, 죽은 욥의 자녀들 수가 자그마치 10명이고 이는 그들이 믿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도 돌려줄 수도 없는 것인데 말이다. 이는 상담과정에서 일어난 비심판적 태도라 할 수 있으며, 욥의 말따마나 그들은 돌팔이 의사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욥기를 두 번 정독한 후, 참고 논문인「자살생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영적 레질리언스」를 읽었다. 논문을 통해 욥의 고통, 그 친구들의 상담 태도, 욥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 등... 욥기의 줄거리에 국한되어있던 나의 시야에서 더 넒은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 욥은 정말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었고, 10명의 자녀를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타인의 존경을 잃었다. 그의 이런 고통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며, 친구들에게 상담하여도 죄인으로 질타를 받는다. 이정도 수준의 위기상황에 처한 클라이언트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발언은 위험하나 그만큼 욥은 엄청난 위기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한다.) 욥기 17장에서 욥은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느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욥기 3장에서는 ‘내가 태어났던 그 날이 없었더라면, ‘아들을 가졌다’고 말하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가려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그늘이 그 날을 삼켜버리고, 구름이 그 날을 덮어버리고, 흑암이 그 날을 덮쳤더라면... 아, 그 날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며, 일 년 중 그 날이 없었더라면, 어느 달에도 그 날이 없었더라면, 아! 그 밤에 아무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더라면’이라는 말을 한다. 욥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욥은 정말로 자살을 생각한 걸까? 나는 아니라는 쪽에 더 힘을 주어 말하고 싶다. 평소 나나 또래의 친구들을 보면 ‘죽고 싶다’라는 말을 정말 심심치 않게 한다. 힘들거나, 덥거나, 배고프거나 등 조금의 고통만 주어져도 말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욥은 실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도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는 것 외에는 희망이 없다’ 정도의 반응만을 보인다. 죽고 싶은 심정이 분명할 텐데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욥은 해소되지 않는 지속적인 고통에 레질리언스가 점점 떨어져 절망을 느끼는 상태로 보일 뿐, 자살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정되어있던 시야를 참고논문을 통해 트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욥이 기독교인이기에 ‘죽고 싶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죽고 싶다는 말, 생각, 충동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고통이 되지 않을까? 기독교인은 그들의 종교적 관점에서 일반인(타종교인, 비종교인)보다 자살이라는 행위에 엄청난 죄악감을 느낀다. 위에서 말했듯이 엄청난 위기상황에 처한 클라이언트에게 자살이라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으나, 기독교인은 일반인보다 자살충동 혹은 자살생각을 떠올리는 그 행위 자체에도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르면 자살은 지옥에 떨어질 만큼의 큰 죄이기 때문이다. 욥기를 통하여 기독교인과 일반인(타종교인, 비종교인)은 자살에 대해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살생각을 가진 기독교인 클라이언트에게는 일반인(타종교인, 비종교인) 클라이언트와는 차별화된 접근방식이 필요할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복지학부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떠올려보면, 모든 클라이언트는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다른 욕구들을 가지고 있기에, 전문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의 환경, 상황, 욕구에 맞는 개입을 선택하여 실천해야함을 나는 학습했다. 하지만 ‘학습’ 그 이상으로 이렇게 와 닿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강의에서 배우는 그 학문 자체만 이해하고 교재의 글을 문자 그대로 이해만 했을 뿐이었다. 비록 자발적으로가 아닌 과제를 통한 깨달음이기는 하나, 클라이언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섣부른 접근은 정말로 위험할 수 있겠다는 것과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상담자의 태도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를 위한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접하는 성경이었는데 예상외로 매우 흥미로웠고, 사회복지실천기술 학문의 이해를 돕는 그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오랜만의 보람찬 독서의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