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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박사, 샌디에고주립대학교 사회사업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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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론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의 발달과정 (무단 복제 금지)

하정미 2018. 9. 17. 18:12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의 발달과정

  하정미 저 

우리나라는 앞서 살펴본 서구 특히 영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사회복지의 전문화가 가속된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유교적이며 권위주의적 전통과 가족주의 및 공동체주의 문화를 이어왔으며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와 더불어 외국의 수많은 침략과 간섭, 식민지 지배, 기독교의 전래와 전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정권의 지배와 급속한 경제성장에 수반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척박한 환경 속에서의 갈등과 살아남기 위한 적응, 그리고 통합과정이 사회복지실천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여 그 발전과정을 사회복지실천 태동기, 사회복지실천 도입기, 사회복지실천방법 모색기, 사회복지실천 활성화기, 사회복지실천 성장기로 구분하여 총 5단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 사회사업의 시작: 사회복지실천 태동기(1900년 전후-1945년 전후)


근대 이전 우리나라의 고대 사회복지제도로는 조선시대 왕에 의한 구휼제도인 진휼과 환곡과 두레, 품앗이, 향약, 계 등의 상부상조 활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사회사업은 조선시대 말 서양의 기독교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된 것은 조선말인 1888년 프랑스 천주교회에 의해 고아원이 설립된 것을 최초로 볼 수 있으며 갑오경장(1894-1896) 이후 인천의 교회부속 고아원이 설립되었고 1907년 평양 맹아학교가 개교하였다(길귀숙 외, 2010). 또한 1905년 이필화는 사재를 털어 경성고아원을 신설하였는데 이를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접수하여 조선총독부 제생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913년 맹아부를 신설하였다.

 

<참고; 경성고아원 이야기>

이승원(2014)의 글을 살펴보면 경성고아원 운영이 비리의 온상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많은 분쟁 끝에 설립 5년 만에 당시 조선정부인 한성부가 인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1905년 10월 ‘경성고아원’이 설립되었다. ...특정한 개인이, 그것도 한국인이 근대식 고아원을 설립한 것은 경성고아원이 최초라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경성고아원은 설립 당시부터 사회 각계각층의 관심을 받았다. 고아원 사업이 각계각층의 절대적 지지와 관심을 받은 것은 고아원 설립 자체를 ‘문명적 자선사업’이자 ‘문명의 척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성고아원은 고아를 보호하는 역할만 하지 않았다. 일종의 ‘고아 학교’였다. ...각계각층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후원금을 냈다. ...자선을 일종의 ‘사업’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각계각층에서 답지한 후원금을 착복한 것을 물론이요, 회계도 투명하게 하지 않아 후원금을 낸 많은 사람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그런 까닭에 1909년 7월 14일자 ’황성신문’에는 경성고아원이 “고아를 이용하여 생활적 경영에”만 집착한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했다. ...경성고아원은 비리의 온상처럼 여겨져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분쟁이 계속되자 1909년 11월 정부가 중재에 나섰다. 결국 경성고아원의 경영은 지금의 서울특별시로 이관되어 ‘공립’ 경성고아원이 되었다. 자선사업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일 터이다. ‘자선’이냐, ‘사업’이냐. ...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하상락(1988)의 글을 보면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창립자가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 즉 민족주의 이념으로 고아교육사업을 하였으나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 운영이 어려운 형편에 있었고 결국 한성부에 의해 강제 인수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진실은 본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복지실천가들은 이러한 논란과 사회적 책무성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광무 9년(1905) 9월 대성(大成)종교인 이필화(李苾和)가 사재(私財) 3,500원을 지불하고 ... 동년 10월에 경성고아학교라는 명칭으로 고아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유교 강독과 연구를 하는 동시에 당시 국내에 강력히 침입하고 있는 일본의 침략세력에 저항하는 애국운동을 하였다. ...경성고아학교는 거리를 방황하는 고아들을 수용하여 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며 또 이들 중 역병(疫病)으로 고생하는 아동들에게는 의료보호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필화는 자기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가며 고아원 운영에 투입하였으나 경제적 사정은 호전되지 않고 부채만 가중할 뿐이었다. ...변충식이 고아원의 재정관리를 담당하고 보니 매월 말에 있어 지출총액이 수입총액보다 500원을 초과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또 하사금품 및 기타 수입 등은 총 지출액에 비하여 극히 소액에 불과을 알게 되었다. ...한성부가 관권으로 경성고아원을 강제 인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일제 강점기의 사회복지실천은 식민지배의 수단으로서 일본 황실의 특별한 배려라는 의미가 포함된 은사금을 그 재원으로 하여(박광준, 2013) 천재지변 등 재해에 의한 이재구호사업, 빈민구호 및 행려병자 구호사업, 군사원호사업, 노인보호사업, 보건(의료)복지사업, 아동복지사업, 근로자 보호사업, 특수교육사업 등을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빈민구호사업과 노인보호사업, 보건복지사업, 아동복지사업 등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불 수 있다(김기태 외, 2007).

이 시기에 순수한 민간차원의 사회복지실천도 미미한 수준이지만 명맥을 유지해 왔었다(김기태 외, 2007). 1921년에는 조선사회사업연구회가 창립되어 아동보호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강연회 및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기관지인 “조선사회사업”을 발행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사업으로는 1921년 최초의 복지관인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태화여자관/태화사회관)이 세워졌다. 이 복지관은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에서 직영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설립이념은 복음전도, 여성교육, 사회사업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선도적 사회복지관을 비전으로 하고 있으며, 지역주민의 건강한 삶과 사회통합, 선도적인 사업개발과 공유를 통한 사회복지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강남구향토문화전자대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복지실천 관련서적으로는 1923년에 간행된 조선사회사업요람과 조선사회사업강습회 강연록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약 20여권의 사회복지관련 서적들이 출간된 것을 볼 때 당시 사회복지실천의 전문적 이론이나 학문적인 면에서 당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이론의 발달이 있었고 사회복지실천에 관한 전문성을 지닌 강의가 대학 수준은 아니더라도 실천가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김기태 외, 2007).

1924년 감리교회 여자 선교사인 볼딩(Bording)이 공주영아원을 설립하고 아동복지사업을 시작하였다. 1924년에 부산공생원, 1927년에는 목포공생원이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일제에 의한 방면위원제도가 실시되었다. 방면위원은 한국인 지역유지나 민간인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오늘날 사회복지전문요원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여 빈민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고 빈곤의 원인을 판명하고 적절한 지도교화 및 구제방법을 강구하였는데(조미숙 외, 2010), 이것을 우리나라 개별사회사업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길귀숙 외, 2010). 한편 1931년 10월에는 감리교협성신학교에 다니던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이 YWCA 농촌파견교사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샘골 마을로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회개혁적인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성직자와 대학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서구의 인보관운동과도 비교되는 한국적 인보관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4년에는 조선구호령이 제정되어 생활보호사업, 노인보호사업, 아동보호사업 등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사회복지실천이 태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복지의 동기와 목적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1945년 독립과 동시에 사라졌다.

 

2. 해방 후 사회복지제도의 탄생: 사회복지실천 도입기(1945년 해방이후 - 1960년 전후)

사회복지실천의 도입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난 극도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다. 이처럼 복잡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회복지실천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우리나라를 구호하기 위하여 들어온 외원단체들의 개별사회사업활동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영향으로 대학에 사회복지/사회사업과정이 개설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가들이 교육과정을 거쳐 사회복지전문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주요한 사회복지실천으로는 아동보호사업과 여성계몽운동과 의료사회사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류상열, 2004).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사회복지실천 또한 암흑기여서 정부에 의한 빈민구호사업이 유일하게 눈에 띄는 사회복지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공공부조의 기본법령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시행된 조선구호령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다. 그때에는 일제의 동원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만주나 중국 등지에서 귀환한 전재민과 이재민이 많이 발생하여, 이들을 위한 민간단체의 구호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들 민간단체들은 우익단체와 좌익단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미군정은 이들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사회복지적 사건으로, 1945년 보건후생국이 설립되었고 1946년 9월에는 보건후생부 내에 부인국이 설치되어 여성의 지위 및 복리증진을 도모하였으며(박광준, 2013) 1949년 인천에 기독교 사회관이 그리고 1956년에 이화여자대학교가 이화사회복지관을 설립하여 여성계몽운동에 기여하였다. 또한 1833년 캐나다 선교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실시한 여전도회 활동을 효시로 하는 의료사회사업으로 미군병원이 설립되었으며, 세브란스 병원에 최초로 사회복지사가 고용되었다. 또한 1953년 아동자선병원, 1956년 대구 파티마 병원 그리고 1958년 한노병원, 1959년 국립중앙의료원, 원주기독병원 등이 개원되면서 의료사회사업 서비스가 시작되어 활발히 전개되었다(류상열, 2004). 게다가 1946년 아동노동법규가 공포 및 시행되었고 1947년 미성년자 노동보호법이 공포 및 시행되었으며 1949년 사회부 내 보건행정을 분리한 보건부가 신설되어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가 탄생하는 듯 했다.

이러한 짧은 시기를 지나 한국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며 수많은 피난민과 고아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우리나라는 소생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해 보였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많은 외국의 민간단체들에 의해 사회복지실천이 도입된 것으로, 이를 개별사회사업실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원단체들의 활동은 종교적 선교활동에 그 주된 목적이 있었으므로 전문적 사회복지실천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1950년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빈곤문제, 아동문제, 가족문제 등이 심각하였으나 우리 정부와 민간 모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전쟁 중이던 1952년 4월 정부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설립 허가신청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는 재단법인의 설립기준을 마련하였고 그 해 10월 ‘후생시설 운영요령’을 지방행정기관에 하달하여 사회복지시설의 설치 운영의 치침을 제공하였다. 1951년 서울시는 시민 전체가 전재민이었고 1953년에는 약 1천만 명이 전재민이었으며(박광준, 2013),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직후 전국의 요보호아동 수용시설은 440개소였고 수용인원은 53,964명에 달했다(구자헌, 1984; 김기태, 2007 재인용).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외국단체나 기관들이 들어와 활발한 구호사업과 자선사업을 전개하였다. 세계기독교봉사회, 메노나이트 한국지부, 기독교아동복리회, 홀트아동복지회, 선명회(현 월드비전), 양친회(현 양친사회복지회) 등 외국의 원조단체들에 의해 설립된 많은 기관들과 이 기관들의 서비스를 조정하고 협의하기 위한 연합기구인 KAVA(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 외국민간원조기관 한국연합회)를 중심으로 사회복지실천이 행해졌는데 주로 기본적인 생계문제, 전쟁고아문제, 장애 아동 및 교육문제 등 중요한 문제들에 개입하였다. 1960년대에는 130여 개의 단체가 KAVA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사회관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1948년 선교사 Helen Boyles는 인천에서 기독교사회관을 자택에서 설치하였고 1952년 Esther Laird가 대전에서 기독교사회관을 설립하여 탁아소 등을 운영하였으며 1954년 Eulin Weems가 서울 마포에 유린관을 세워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전쟁 후 태어난 혼혈고아들은 인종적 순수성을 지향했던 한국정부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하여 해외로 보내졌으며 수많은 한국인 고아들도 혈연을 중시하는 문화로 인해 국내에서 입양할 사람을 찾지 못하고 해외로 보내졌다.

1950년 전후로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사가 전문성을 갖고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대학에서 사회복지실천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사회복지실천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1947년 이화여자 대학교에 기독교사회사업학과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회복지전문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전문적 사회복지실천에 앞서 전문적 사회복지교육이 먼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세브란스병원이나 상담소 등에서 사회복지사를 고용함으로써 전문적 사회복지실천이 시작되었다(조미숙 외, 2010). 1953년에는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 사회사업학과가 개설되었고, 1956년에 사회복지 전문 인력 단기양성소인 국립중앙사회사업종사자 훈련소가 창설되었으며 1957년 한국사회복지학회가 창립되었고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학부에 사회사업학과가 개설되어 미국식 실천이론과 방법론을 도입한 대학교육을 중심으로 사회복지전문인력 양성이 이루어졌다.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가 사회단체로 결성되었는데 1961년에 사단법인으로 변경되었으며 이와 함께 사회복지사로써 전문적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가들에 의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여 1952년 부산기독교사회관이 설립되었다. 1956년 이화여대 부속 사회관을 개관하였고 1958년에는 군산기독교사회관이 설치되었다(김기태 외, 2007). 이들은 1958년 태화관에서 ‘감리교 사회사업가협회’를 발족하여 실천경험을 공유하고 연구모임을 가지며 보다 전문적 실천을 위하여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였다(김기태 외, 2007). 1958년 한노병원에서 의료사회사업가가 처음으로 일하게 되었고 1959년에는 국립의료원, 원주기독병원 등에서 의료사회사업이 시작되었으며 ‘한국개별사회사업가협회’가 결성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사회사업가 집단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3. 군부독재정치 하의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복지제도의 형성: 사회복지실천방법 모색기(1960년 전후- 1980년 전후)

 

이 시기는 1963년 군부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1979년까지 이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독재정치시대로, 당시 국민의 40% 이상이 절대빈곤 상태였으므로 정부는 경제성장을 통한 빈곤해소를 최우선과제로 하여 자본주의적 경제개발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 현상이 급속히 나타나면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고 많은 사회복지입법이 이루어져 사회복지의 형식적인 법체계가 갖추어졌다. 또한 대부분의 외원단체들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회복지프로그램을 수행하였으나(류상열, 2004), 1970년대 말 사업을 종결하고 한국을 떠나기 시작함으로써 사회복지실천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사회복지 전문적 실천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자체 사회복지실천이 모색되기 시작했다(조미숙 외, 2010). 그러나 선성장후분배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복지나 사회복지실천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사회복지제도의 주요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1961년 생활보호법이 제정되어 일제에 의한 조선구호령이 폐지되므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공부조의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1967년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탄생하였고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 제정시행, 사회복지사업종사자 자격제도 시행되어 현장에서 근무하는 전문 인력의 자격과 관련된 사항이 최초로 명시되었다. 이 법에서는 사회복지사업을 “생활보호법, 아동복지법·노인복지법·심신장애자복지법, 윤락행위등방지법 등의 법률에 의한 보호, 선도 또는 복지에 관한 사업과 사회복지 상담, 재해 구호, 부랑인 선도, 직업 보도, 인보 복지, 의료 보호, 사회복지관 운영, 나병 완치자의 사회복귀에 관한 사업 등 각종 복지사업과 복지시설의 운영 및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제2조)”으로 정의하였다.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정되었으나 1988년부터 시행되었고 1976년 의료보험법의 전문이 개정되어 사회보험으로서의 의료보험이 시행되었는데, 실제로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된 것은 1989년이었다.

한편, 1970년대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지역복지운동이 한국식으로 정착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정부주도의 사업구조로 인해 정치와 정권에 지나치게 밀착된 점 등으로 볼 때 지역사회복지가 추구하는 이면 및 정책방향과는 유리된 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조미숙 외, 2010). 이 같은 지역사회사업실천은 1980년대 이후 사회복지관사업과 재가복지센터의 확대 등 지역사회 및 재가복지사업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다(조미숙 외, 2010).

의료사회사업의 경우 전문사회복지실천가들을 채용하기 시작하였는데 1970년 연세의대 부속 세브란스 병원, 1972년 연세의대 부속 보건소, 1977년 성분도병원 등이 있으며, 재활의료사회사업에서 사회복지실천가를 채용한 경우로는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1974년), 가톨릭의대 부속 산업재해병동(1976년), 전주예수병원(1977년), 부산한병원(1978년), 메리놀병원(1979년) 등이 있다(류상열, 2004). 또한 1973년 대한의료사회사업가협회가 창립되었으며 2000년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회복지실천 도입기인 해방 후의 시기에 이어 이 시기에도 대학에서 사회복지사를 양성하는 전문교육이 계속 확대되었는데,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1962년 중앙대학과 원주대학(현 상지대학교), 1964년 성심여대(현 카톨릭대학교), 1968년 서울여자대학, 1969년 숭실대학교와 부산대학교에 사회사업학과가 설치되었다. 또한 국립연수기관에서도 사회사업 전반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65년에는 한국사회사업교육연합회(현 한국사회복지교육협의회)가 탄생하였다. 

     

<참고, 부산 형제복지원>

 

한국 현대사에서 ‘최악’으로 기억된 인권침해 사건이 자행된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권인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 위치했던..., 3,146명이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이에 35명이 탈출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이 드러나게 되었다.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이 결성되었다. 2014년 3월 2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형제복지원의 진실'에서는 27년 간 감춰져 온 이 사건의 의혹과 진실이 방영되었고 미국의 AP통신은 2016년 4월 이 사건을 “지옥 중의 지옥(Hell within Hell)”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는데, 이 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의 중노동은 물론 수용자들에 대한 구타와 감금 그리고 아동에 대한 일상적인 성폭행까지 자행됐으며,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8%95%EC%A0%9C%EB%B3%B5%EC%A7%80%EC%9B%90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20에서 발췌.


4. 민주화와 생존권 운동의 영향: 사회복지실천 활성화기(1980년 전후- 2000년 전후)

 

이 시기는 일방적 개발위주의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한 이후 경제위기를 맞이하기까지의 시기로 사회민주화와 국민의 생존권운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박광준, 2013). 1987년 체육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제5공화국에 항거하는 6월 항쟁이 발생하였고 6.29선언을 통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확보되었으며 1988년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어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되었다. 또한 이때 노동자의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되므로 노사분규가 급증했으며 시민사회가 성장하여 1990년대의 사회복지운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통치의 위기, 즉 계급지배의 위기를 불러왔고 곧 복지정책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했다(박광준, 2013).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복지실천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사회복지관의 활성화재가복지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 것과 더불어 사회복지사의 증가일 것이다(조미숙 외, 2010). 1983년에 개정된 사회복지사업법에서는 사회복지관사업을 법정사업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복지관사업을 본격화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고, 1985년부터 시⦁도 단위로 종합사회복지관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9년에는 사회복지관 설치 및 운영규정으로 영구임대아파트단지에 사회복지관 설치가 권장되면서 전국적으로 사회복지관이 확대되고 전문적인 사회복지실천의 장이 마련되어(조미숙 외, 2010) 1986년 27개였던 사회복지관의 수가 1997년에는 315개로 늘어났으며 1997년 말, 사회복지관에 근무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의 수는 2,500명으로 추산되었다(김기태 외, 2007). 그러나 1980년대까지도 시설보호서비스가 여전히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1989년 사회복지시설 수용현황을 살펴보면 총 667개의 시설에 7만 7천 명 정도나 시설보호대상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사회보호정책의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류상열, 2004).

사회복지관의 확대로 인해 민간영역의 사회복지사 증가 뿐 아니라, 1987년 생활보호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대도시 빈곤 지역 동사무소에 7급 별정직으로 사회복지전문요원이 임용되기 시작하면서, 공공영역에 사회복지사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였고(조미숙 외, 2010) 1999년 9월부터는 별정직에서 일반직으로 전환되어 사회복지사들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으며 근무여건이 개선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7년 49명의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이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1994년까지 모두 3,000명의 사회복지전문요원이 배치되었으며 사회복지분야의 공무원으로는 주로 아동복지지도원과 여성복지상담원들이 있는데 1997년 말 기준으로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총 4,300명으로 집계되었다(김기태 외, 2007). 이외에도 대학마다 사회복지학과들이 설치되면서 사회복지사 배출 증가, 사회복지실천의 전문성 증가 등 사회복지실천이 질적, 양적인 측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조미숙 외, 2010). 1980년대 이전에는 전국에 걸쳐 10개 대학에서만 사회복지학과가 개설되었지만 사회복지사의 수요가 늘면서 2006년 한국사회복지교육협의회에 등록된 대학의 수는 65개에 달하여 해 마다 4,000명 이상의 사회복지사를 배출하였다(김기태 외, 2007). 한편 1990년대에는 사회복지현장 전문 인력의 자격과 관련된 사항들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6년 전문사회복지사 자격증 제도를 시행하였으나 200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였고 1997년 정신보건법이 시행되면서 정신보건사회복지사가 탄생하여 지역사회중심의 정신보건사회복지를 실천하게 되었다. 또한 1997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사회복지사의 자격제도를 법에 명시하여 1급과 2급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부여되었다. 2001년 12월 당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수는 52,593명이었다(김기태 외, 2007). 1992년 사회복지전담요원을 사회복지전담공무원으로 제도화하여 전국적 배치가 이루어졌고 복지사무전담기구가 법제화되었으며 지역사회복지관에 재가복지봉사센터가 전국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1993년 노인복지법이 개정되고 1994년에는 방문간호사업도 시작되어 재가복지가 활성화되었다. 이 후 2010년 재가복지봉사센터는 종합사회복지관의 재가복지봉사서비스(지역사회보호사업)로 흡수 통합되었다. 또한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되었지만 이 법은 이 후 2016년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지원에 관한 법률로 전부 개정되었다. 교육부에서 실시한 학교사회복지는 1997년 ‘학교사회사업 시범연구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같은 해, 한국학교사회복지학회가 만들어졌으며 2000년 한국학교사회사업실천가협회가 창립되었다. 그 외에도 1997년 사회복지공동모금법이 제정되었고 1999년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어 수급권이 보장되었다.

 

5. IMF 경제위기 이후의 변화: 사회복지실천 성장기(2000년 전후부터- )

 

1997년 아직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던 우리나라는 IMF 경제위기로 인하여 대규모실업사태를 경험하였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급속히 심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제성장에 의존하는 복지모델에 한계가 드러나게 되고 사회복지에 대한 국민의 의식변화가 일어나므로 복지의 정치화가 발생했다(박광준, 2013). 또한 2000년대에 들어서 사회적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문제, 새터민 및 다문화가정의 증가로 사회복지실천에 있어서 임파워먼트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고 민간사회복지분야에서 책임성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면서 사회복지실천에 있어, 서비스의 효과성과 효율성의 입증과 조사연구가 주요한 역량으로 강조되었다(조미숙 외, 2010).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한 변화로는 먼저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어 보충급여와 자활사업이 실시되었으며 수급억제적인 요소로 지적받아 온 예산할당주의가 신청주의로 바뀌었고 실업자가 공공부조의 대상자로 포함되었다.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되어 저출산에 대응하는 정책이 실시되었고 2008년 기초노령연급이 도입되었으며 같은 해 노인장기요양보장제도가 시행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2001년 여성부가 신설되었고 2003년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법제화되어 지역단위의 복지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으며 2003년 사회복지사 1급 국가시험이 실시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복지실천과 관련된 교과과정도 개편되고 전문적 실천의 장도 확대되어졌다(조미숙 외, 2010). 그러나 사회복지사 자격증의 남발로 인하여 사회복지전문직의 질적 저하에 대한 우려가 증가했다. 2004년 민간주도의 We Start사업이 실시되었고, 지역아동센터가 법제화 되었으며 2004-2006년 사회복지사무소의 시범사업이 실시되었고 2005년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개편되었으며 2005년 전국 시군구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구성되었고 2005년 제 1회 학교사회복지사자격시험이 한국사회복지사협회와 한국학교사회복지학회 및 한국학교사회복지사협회 등의 공동 주관 하에 시행되었다. 또한 2007년 공공주도의 희망스타트 시범사업이 실시되었고 2008년 드림스타트로 변경 및 사업지역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2014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개정되었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므로 재난과 위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2015년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맞춤형 급여’체계가 시행되었다.

 

6. 사회복지실천의 과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은 그 역사가 짧으나 해방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한국전쟁과 독재정부의 통치, 민주화운동, IMF 경제위기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외국의 영향과 함께 우리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반영하면서 많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양적으로 크게 팽창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경제적 침체, 노령화, 양극화현상과 다양화된 사회와 가치관의 혼란, 환경오염과 재난의 증가 세월호 사건과 촛불집회, 문재인정부의 출범 등과 같은 최근의 환경변화와 서비스 책무성에 대한 요구 증가, 전문직의 정체성, 재난과 위기개입의 필요성 증가, 자살,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등과 같은 정신건강문제의 증가, 청소년 비행, 노숙자, 새터민의 증가,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국민적 욕구상승, 전문적 서비스에 대한 욕구 증대 등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슈에 대처할 수 있는 보다 전문적 사회복지실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서비스에 있어서 시설보호에서 재가보호로의 전환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우리나라도 1990년대 이후 재가복지를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은 시설보호와 재가복지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어서(류상열, 2004),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복지서비스의 질적 향상 및 책무성의 향상이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질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회복지사에 의해 좌우되며 사회복지사의 수준 향상은 곧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대상자들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김성이, 2007).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복지실천가들이 전문성을 갖추고 사회복지서비스의 질을 향상하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다. 첫째로 사회복지사는 봉사자라는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 동안 사회복지실천이 과거 고아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시설수용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기에 구제사업이나 자선사업적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 줌으로써 전문성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김기태 외, 2007). 둘째, 사회복지사들의 근로조건 개선이 필요하다. 사회복지사들의 임금수준은 도시노동자들의 임금의 64.4%로 매우 낮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평균근무기간이 4.6년으로 잦은 이직률을 나타낸다(김성이, 2007). 사회복지사들의 임금수준 향상, 근로시간 단축 등을 통한 근로조건 개선은 사회복지사의 권익향상은 물론 사회복지 서비스 향상의 가장 필수적인 과제이다. 셋째, 전문가양성을 위한 교육훈련이 강화되어야 한다.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제도가 변화함과 동시에 평생교육원, 학점은행제, 사이버대학, 행정대학원을 비롯한 다양한 이름의 특수대학원 등의 대학교육이 무분별하게 확대되고 일부대학들이 사회복지학과를 대학의 돈벌이 학과로 여기며 운용하여 사회복지 전문직의 위상을 추락시킬 뿐 아니라 교육내용 및 실습의 부실 등 사회복지사의 질적 수준을 하락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전문대학원 교육을 통한 전문사회복지실천가 양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넷째, 사회복지실천의 책무성이 확보되는 윤리적 실천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실천현장에서 후원금 및 정부보조금을 ‘눈먼 돈’으로 여기는 불법적 사용에 대한 문제와 서류 및 회계장부의 조작, 서비스의 비효율성과 비효과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심지어는 사회복지서비스를 개인적인 목적이나 사업적 목적으로 실시하는 ‘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복지실천현장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적폐가 청산되고 보다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때 사회복지실천의 질적 향상과 전문성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사회복지사들의 사회행동이 강화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실천이 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실현과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사회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복지사들은 이를 외면해 온 실정이다. 여섯째, 사회복지실천가들의 실천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천방법과 기술의 향상과 이에 대한 연구가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사회과학의 기반 또한 연약한 풍토에 놓여 있었으므로 사회복지실천이 발달할 수 있는 토양이 매우 척박하였고(김기태 외, 2007) 실천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며 또한 연구방법에 있어서 엄격성과 윤리성에 있어서도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 연구의 윤리성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질적연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자문화기술지 연구방법, 사례연구, 현상학적 연구 등이 등장함에 따라 사회복지실천가들의 개별적인 경험이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다.